장석광장석광

송나라 사신을 맞는 자리였다. 사신은 위풍당당한 선비들을 모두 지나 제일 말석의 한 선비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허름한 복장에 키도 작고 못생긴 얼굴이었지만 사신은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본 것이다. 조선 초기 문신 성현(成俔)이 쓴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관상(觀相) 인상(人相) 골상(骨相), 명칭이야 어떻든 한눈에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은 스파이세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인상학은 정보요원이 반드시 연구해야 할 과학적 상식이다. 정보요원은 다음 인상을 주의해야 한다. 머리가 크고 입이 크며 코가 넉넉한 자는 능력있는 정치적 수령이다. 눈이 깊고 빛나며 코가 높고 굽은 자, 얼굴이 마른 자는 음모가 있고 독악한 인물이다. 허리가 가늘고 등이 굽은 자는 마음이 악하고 무정하며 이기심이 강한 인물이다. 곰보는 재능과 능력이 있다.’ 일제강점기 의열단의 정보요원 교재 ‘정보학개론’에 수록된 내용이다.

어느 해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한 정보요원이 유명한 관상가를 찾았다. 결과는 박빙의 차이로 빗나갔다. 다시 찾아온 요원에게 건네진 관상가의 상담일지에는, 요원에게 말한 후보와는 다른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걸로 적혀 있었다. 관상가는 낙담할 요원이 애처로워 그렇게 얘기했다고 설명했다. 요원은 그 후 그의 광팬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보기관의 북한부서는 정월 초부터 바쁘다. 유명 역술가들이 풀이하는 김일성, 김정일의 한해 운세를 미리 듣고 검토 보고를 올려야 한다. 정보기관장이 시중에서 먼저 듣고 검토 지시가 내려왔을 땐 이미 늦다. 사전 보고를 통해 ‘별거 아니다’라고 미리 김을 빼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요원들이 사주를 내놓는 순간 역술가들은 기관에서 왔다는 것을 알아챈다. 방귀깨나 뀐다는 역술가들은 웬만한 정치인이나 기업인, 연예인 사주는 꿰고 있다. 세상사를 풀이하는 요령도 대학교수나 기자 못지않다. 정보요원이 여기에 자칫 혹(惑)하면 판단에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접근이 지극히 어려웠던 오래 전 일이다. 북한부서가 역술가를 만나는 동안 수사부서는 천지신명을 만난다. ‘間諜必捕(간첩필포)’ 플래카드가 붙여지고, 돼지머리, 시루떡, 북어, 과일 등의 고사상이 차려진다. 간첩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축문이 낭독되고, 수사관들은 돌아가며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간첩을 잡는다는 것은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고사라는 의식을 통해 전체가 하나로 마음을 모으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미국도 비슷하다. CIA 본부 정문 앞에 동상이 하나 있다. 하단에는 "조국을 위해 잃을 수 있는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1776년 9월 22일, 스파이 활동을 하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로 영국군에 처형된 네이선 헤일(Nathan Hale)이 동상의 주인공이다.

언제부턴가 CIA 요원들이 헤일의 발아래에 76센트나 워싱턴의 얼굴이 새겨진 25센트 동전을 놓아두기 시작했다. 헤일이 임지로 떠나는 CIA 요원과 가족들에게 행운을 준다는 속설이 요원들 사이에 믿음으로 확산됐다. 76센트는 헤일이 처형된 해, 25센트는 헤일이 워싱턴 장군 휘하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예나 지금이나, 스파이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스트레스가 극한인 직업임에 틀림없다.

4시 44분이다. 어제도 그제도 4시 44분이었다. 오늘은 잠을 깨고 일부러 조금 더 있다 눈을 떴는데도 역시 4시 44분이다. ‘에이! 조금 더 있을 걸!’ 찜찜한 마음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조간신문을 찾아 화장실로 향했다. 제일먼저 오늘의 운세를 펼쳤다. "흔들림 없이 안정감 있는 삶을 유지하도록 하라."

 

관련기사